형광펜 세 자루 다 쓰고 시험을 망쳤습니다

교재를 세 번 읽었는데 시험장에서 백지가 되는 이유. 익숙함과 기억은 다른 거였고, 저는 그걸 2학년 때까지 몰랐습니다.

·약 6분

시험 이틀 전이었습니다. 저는 교재를 이미 두 번 읽었고, 세 번째로 읽는 중이었어요. 노란 형광펜은 다 써서 초록으로 바꾼 상태였고, 페이지가 알록달록해서 보기만 해도 뿌듯했습니다.

읽는데 술술 넘어가더라고요. "아 이거 알지", "이것도 알지." 한 페이지에 30초씩 걸렸습니다. 세 번째니까 당연하죠.

그렇게 다 읽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완벽한데?

그리고 시험장에서 3번 문제를 보고 20분을 앉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형광펜 칠한 부분에서 나온 문제였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색깔은 기억나는데 내용이 기억이 안 났습니다. 진짜로요.

익숙함이랑 기억은 다른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때 제 뇌가 느낀 "안다"는 감각의 정체는 이거였습니다.

"이 문장 본 적 있음."

그게 전부였어요. 문장을 알아보는 능력이랑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머릿속에서 꺼내오는 능력은 완전히 다른 기능인데, 저는 앞엣것을 뒤엣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1회2회3회 1회2회3회 교재를 다시 읽었을 때 덮고 꺼내 봤을 때 익숙함 실제로 꺼낼 수 있는 양 익숙함 실제로 꺼낼 수 있는 양 벌어지는 간격 = 착각의 크기 간격이 안 벌어집니다
다시 읽을수록 '안다'는 느낌만 자랍니다. 그 느낌이 시험장에서 배신하는 거예요.

다시 읽기의 진짜 문제는 이겁니다. 꺼내는 연습을 단 한 번도 안 시킨다는 것. 계속 답을 눈앞에 펼쳐 놓고 "이거 알지?" 하고 확인만 시킵니다. 그런데 시험은 답을 안 보여 주고 꺼내라고 하잖아요. 연습한 적 없는 걸 시험장에서 처음 하는 거예요.

형광펜은 한 술 더 뜹니다. 칠하는 동안 뇌가 하는 일은 "중요한가?" 판단뿐이고 기억을 만드는 작업은 안 일어납니다. 게다가 칠해 놓은 페이지는 다음에 볼 때 더 익숙해 보여서 착각이 더 강해져요. 저는 3년 동안 착각을 열심히 강화하고 있었던 겁니다.

방법은 허탈할 정도로 단순합니다

인출 연습이라고 부르는데, 절차는 이게 다예요.

  1. 한 단락이나 한 챕터를 읽는다
  2. 책을 덮는다
  3. 방금 읽은 걸 백지에 쓰거나 소리 내서 말한다
  4. 책을 열어서 빠뜨린 걸 확인한다

핵심은 3번입니다. 꺼내려고 낑낑대는 그 순간에 기억이 만들어져요. 재미있는 건, 꺼내는 데 실패해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끙끙대다가 정답을 보면, 그냥 정답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오래 남아요.

처음 해 보면 좀 충격받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어요. 방금 읽은 챕터인데 책 덮고 나니까 세 줄 쓰고 손이 멈췄습니다.

읽는 동안 내 머릿속 아 이거 알아 책 덮고 백지에 쓴 것 … 어? 뭐였지
처음 해 보면 다들 이렇습니다. 창피한 게 아니라, 그게 지금 시점의 진짜 실력이에요.

이게 정상입니다. 창피한 게 아니라 그게 지금 시점의 진짜 실력이에요. 그리고 이걸 시험장에서 알게 되는 것보다 지금 아는 게 백 번 낫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인출 연습을 안 하는 이유가 정확히 여기 있습니다. 불편하거든요. 책 덮으면 아무것도 안 떠오르고, 그 상태가 꽤 불쾌합니다. 반면에 다시 읽기는 매끄럽고 진도 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대부분 자기한테 덜 도움 되는 쪽을 더 효과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공부하면서 느끼는 유창함이랑 실제 학습량이 정반대로 가는 거죠. 야속하지만 그렇습니다.

실제로 끼워 넣는 법 네 가지

거창하게 시간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는 일에 끼워 넣는 겁니다.

강의 끝나고 3분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노트 덮고, 오늘 배운 거 세 개를 빈 종이에 적습니다. 진짜 3분이면 돼요.

이걸 매 강의마다 하면 시험 기간에 복습할 양 자체가 줄어듭니다. 저는 이거 하나만 바꾸고도 체감이 컸어요.

읽기 전에 소제목을 질문으로

교재 소제목이 "수요의 가격탄력성"이면, 읽기 전에 "가격탄력성이 큰 재화랑 작은 재화가 뭐가 다르지?"로 바꿔 놓습니다. 답을 찾으면서 읽으면 읽기 자체가 인출에 가까워져요.

목차만 펴 놓고 설명해 보기

시험 전에 이게 제일 효율이 좋습니다. 강의 슬라이드 제목만 쭉 펼쳐 놓고 하나씩 말로 설명해 봅니다. 막히는 항목이 곧 공부할 목록이에요.

전 범위를 다시 읽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무엇보다 뭘 모르는지 정확히 알려 줍니다.

안 배운 상태에서 문제 먼저 풀기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효과가 좋습니다. 기출이나 연습문제를 배우기 전에 먼저 풀어 봐요. 당연히 거의 다 틀립니다.

근데 틀린 뒤에 듣는 강의는 이해가 완전히 다릅니다. 뇌가 이미 그 질문을 붙들고 있어서, 답이 나오는 순간 딱 걸려요.

비율은 1대 1로

읽기랑 인출을 반반으로 잡으시면 됩니다. 한 시간 읽었으면 한 시간은 덮고 꺼내는 데.

대부분은 9대 1 정도로 쓰고 있고(제가 그랬습니다), 그게 시간 대비 성과가 안 나오는 주된 이유예요. 처음엔 5대 5가 너무 과하게 느껴지는데, 두어 번 해 보면 왜 그래야 하는지 몸으로 알게 됩니다.


무엇을 꺼낼지 정했으면, 다음은 언제 꺼낼지입니다. 그건 간격 반복 쪽에서 이어집니다. 둘을 같이 쓰면 효과가 곱해져요.

짧은 단위로 꺼내는 연습을 자동화하고 싶으면 플래시카드 만드는 법도 보세요. 다만 카드는 잘못 만들면 그냥 시간 낭비라서, 만들기 전에 읽어 보시는 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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